장모님은 돌아가시던 날 아침, 수술 시간이 두 시간 늦어져 기다리는 동안 아내에게 기도 얘기를 하셨다. “누구를 위해서는 이렇게 기도했고, 누구를 위해서는 저렇게 기도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기도해 온 일을 이제는 아내에게 맡아 달라고 하셨다. 물론 그 전에도 아내에게 ‘기도를 맡아 달라’고 하셨기에 또 기도 얘기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전날 허벅지뼈가 90도 꺾여 부러진 상태라 통증이 상당히 컸을텐데 기도 얘기를 하셨다. 마치 유언을 남기듯 기도 얘기를 하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수술 후 회복 과정에서 쇼크가 발생해 돌아가셨다. 기도 부탁 얘기가 유언이 되고 말았다.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 이런 죽음을 사모한다. 세상 떠날 때, 목숨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응하는 것, 자녀에게 기도의 대를 이으라고 유언을 남기는 것, 헤어짐의 시간이 너무 짧아 유족들은 황망하지만 고인의 한 평생은 정말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죽음 앞에서 누구도 자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평상시 기도하며 사셨다. 장모님은 좀 더 젊은 날, 하루 종일 장사하시고 고단하실텐데 조금 눈 붙이신 후 밤 12시가 되면 교회 가서 기도하시고 새벽예배를 드린 후 돌아오셨다. 모처럼 찾아온 딸과 사위가 ‘오늘은 하루 가지 마시라’고 해도 웃으며 가셨다. ‘내 몫의 기도, 오늘 몫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연세가 드신 후 교회 출입이 자유롭지 않을 때에도 하루 두 번 시간을 정해 본인의 방에서 기도하셨다. 우리 교우들 중 환우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물어보며 기도하셨다. 장모님의 전화는 늘 우리 성도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였다. 그랬다. 늘 기도하며 사셨기에 마지막 남기는 말도 기도 얘기였고, 기도 부탁이셨다.

누구나 기도한다. 그러나 중보 기도를 평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기도하는 분도 계시다. 장모님이 그러셨다. 그리고 본인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도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하며 그 기도를 이어갈 사람을 생각하셨다.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그 부분에 대한 염려가 있다. 중보 기도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중보기도 담당할 사람을 찾는 것도 그분에게는 중요한 과제였다.

이제는 그분이 안계시다. 성도의 안부를 묻는 전화도 오지 않는다. 이제 그분이 하시던 기도만 우리에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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