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오 목사 / 요한복음 12:1-8

설교제목: “사랑, 거룩한 낭비”
설교본문: 요한복음 12:1-8

요한복음 12장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출 12:13; 21-28을 볼 것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년 품삯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요약

오늘 본문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사건(1)이라고 먼저 얘기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요한11:53). 좀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마을입니다.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이 오시자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2). 여기까지는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 남매 중 막내인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3a). 본문은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향유는 쏟아붓지 않고 몇 방울만 뿌려도 향유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 찹니다. 향유 가격이 3천만원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마리아가 머리를 풀어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도 예사롭지 않은 행위입니다.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마리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없이 침묵합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마리아라 하더라도 ‘지나치다’, ‘이상하다’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과 병행구인 마태26:6-13, 마가14:3-9에서는 이 여자의 행위에 화를 낸 사람이 ‘제자들’이라고 합니다만 요한복음 본문은 콕 찝어서 ‘가룟유다’(4)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가룟유다를 ‘도둑놈’(6)이고 ‘장차 예수를 넘겨줄’(4) 자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가룟유다가 한 말은 다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같지 않습니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5). 당신은 유다의 발언을 반박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도예수님께서 철부지같이 행동하는 마리아를 책망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발언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행동 자체에 대한 것(7)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룟유다의 주장에 대한 것(8)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낭비처럼 보이겠지만 마리아는 고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낭비가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생명의 근원을 알게 되면 예수님 외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향유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할 순간을 맞이합니다. 아니 우리 인생 자체가 향유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삶을 향유처럼 쏟아 부은 것입니다. 절대적 생명의 근원을 경험한 사람은 향유를 아까워 하지 않고 그 절대적인 것에 쏟아 부으며 행복해 합니다.
가룟유다의 의견도 부당하지는 않습니다. 구제는 인간의 행위 중 가장 귀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오실 날까지 마땅히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있겠지만 예수님은 항상 있지 않다’(8)는 말씀의 핵심은 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가룟 유다 중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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