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제자도의 위기”
설교본문: 누가복음 22:24-34
누가복음 22장
설교요약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은 예수님에게도 힘든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시지만, 십자가 앞에서 ‘아버지의 뜻’이라는 단서를 달지만 이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22:39)는 기도하시는 약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가 참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어느 정도 버팀목이 되어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제자도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 힘들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세 가지의 경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룟유다에게서 일어납니다.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나를 넘겨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21)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제자 일반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순간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습니다(24). 지금 상황은 예수님이 오늘 밤 체포당하고 야간 심문을 당한 뒤에 다음날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직전입니다. 스승과 동고동락했다면,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함께 한 제자라면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이 시점에서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누가 더 크냐’는 논쟁 끝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는 말씀(31)은 사탄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가지고 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이 체포당한 후 몰래 따라가 구경꾼의 자리에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정합니다. 실은 22:34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미리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중심을 잡지 못했을까요? 특히 베드로는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까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신상의 위협을 실감했습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지도층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제자 집단은 당연히 해체되고 말겁니다. 실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 모든 제자들이 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한 상황에서 도망갈 수도, 예수님 석방을 위해 손을 쓸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입장입니다. 베드로는 복잡한 마음으로 신분을 숨긴 채 분위기를 살피던 중, ‘당신도 예수와 같은 편이지요?’ 묻는 여종의 질문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나는 아니오’(22:57,58,60)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곧 후회합니다(22:62).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붙든다는 무엇인가?” “나는 세상살이에서 예수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가?” “예수님 제자라는 사실보다 내가 속한 체제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얼마나 확보하고 드러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참고, 고린도전서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