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오 목사 / 마태복음 5:13-20

설교본문: 마태복음 5장 13-20절
설교제목: “더 나은 의(義)”

마태복음 5장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설교요약

  초대교회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율법 이데올로기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모든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문제는 복음의 자유를 극단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참, 요한계시록2:6,15). 구원받았으니 모든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의 자유를 오해하면 자신의 자유와 다른 이의 자유가 충돌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17). 그리고 20절에서 율법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십니다. ‘너희 의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의’는 율법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으로 자유를 얻는 기독교인들이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율법적이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율법을 억지로 지키기도 하고 지키는 것처럼 보이려는 위선도 나타납니다. 율법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다 힘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십니다. 그게 뭘까요?

  오늘 본문 ‘소금과 빛’의 비유를 이런 배경에서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4). 소금이 되라거나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이다’, ‘빛이다’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함으로 되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으로 이미 소금, 빛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선언과 ‘우리는 소금입니다’라는 정체성의 고백이 동일한지 살펴봐야합니다. 뭔가 되지 않은 존재에게 뭔가 되었다고 말하면 불편하거나 쓸데없이 우쭐되는 현상이 생깁니다. 복음 앞에서 우리의 어설픔이 여기 있지 않나요? 소금이라는 정체성, 빛이라는 정체성만 있으면 맛을 내고 빛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신 후 ‘너희 착한 행실’을 얘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착한 행실이 우리 등불로 빛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바리새파 사람의 율법과 어떻게 다를까요?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해야 한다는 행위 자체에 매이는 것이 율법이라면 그 사람됨이 변화되어 그 됨됨이로 나타나는 삶이 율법 이상의 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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