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오 목사 / 마가복음 11:1-11

설교본문: 마가복음 11:1-11
설교제목: “숨어 있는 평화의 왕”

마가복음 11장
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설교요약
이번 주간은 종려주일이면서 고난주일입니다. 이 말은 결혼과 장례가 한 날에 이루어진 것처럼 어색합니다. 고난주일의 분위기는 애도와 탄식인 데 반해 종려주일은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의 날짜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내용은 요한복음 12장에 근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탄 동물이 새끼 나귀라는 사실입니다. 권위 있게 보이려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야 합니다. 이것은 스가랴9:9-10의 예언에 근거합니다.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고, 그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줄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나귀 사건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구약 말씀은 창세기 49:11, ‘유다지파 중에서 통치자가 나오는데 포도나무에 나귀를 매어 놓는다’는 말씀이 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은 제왕 의식에 속합니다.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메시아로서 평화의 왕이라면 후자는 만왕의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능력이 큰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소서’라는 뜻인데 원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외침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도 등장합니다(삼하14:4, 왕하6:26). 마가는 지금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호산나’라는 외침에 받으실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또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참된 왕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전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보통, 왕은 전쟁을 중요한 과업으로 여기며 승리하여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보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며, 우리는 그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믿고 그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하나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정말 평화의 왕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평화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가? 또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는가?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알고 환호한 사람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과 일부 추종자들입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인식한 사람은 일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도 공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나귀를 탔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도 못합니다. 11절을 보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이렇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 평화가 현실적으로 실감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맙시다. 초라해 보여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미 평화는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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