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누가복음 15:20-24
설교제목: “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설교요약)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회적 특징은 ‘공정’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여 출발점에서 억울함이 없게 하자는 겁니다. 봉건사회에 비하면 굉장히 발전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는 공정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렇다’고 답하지 않습니다. 표면상의 공정과 실질적인 공정의 격차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실, ‘나 중심의 공정’을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공정에서 출발한 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실수했을 때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패배한 사람은 패배의 과정에서 원인이 있었을테니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고 다시 기회를 주면 공정하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욕망으로 선택하여 실패했을 경우 그 실패의 짐을 지는 것이 공정하다고 봅니다. 세상은 패전부활전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우리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뉘앙스를 보면 ‘탕자’보다 ‘되찾은 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24,32). 어느 것이 맞을까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정을 주장하는 형(큰 아들) 관점에서 보면 그 둘째 아들은 ‘탕자’일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하나님)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은 ‘되찾은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맞을까요? 탕자? 되찾은 아들?
둘째 아들, 탕자 맞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합니까?(12) 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은 투자하다 실패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탕진한 못난 놈입니다(13,14). 이제는 생계의 위협을 너머 생존의 위협을 느낄 지경에 이르자(15,16), 그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17). 제 정신이 드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 자리가 아버지(하나님)가 떠오르는 자리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갈증을 느낄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갑니다'(20). 실패해서, 굶주려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둘째 아들의 심경은 어떨까요? 생각해 보면 아버지 뵐 면목도 없고,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내쫓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했을까요? 그래도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참 잘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하나님)가 계속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0절을 자세히 봅시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까? 둘째 아들입니까? 아버지 입니까? 또 놀라운 사실은 아들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21)고 말하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안하십니다. 그저, ‘좋은 옷 입히고, 손에 반지 끼워주고, 신을 신겨라'(23), ‘소고기 파티’하자(24) 그러십니다.
아버지(하나님)은 실패의 원인도, 책임도 묻지 않으십니다. 공정을 주장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겠지만(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탕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되찾은 아들’로 여기십니다(24,32). 인생에서 실수나 실패를 안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됩니까? 아차, 발 한번 잘못 디디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실패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십니다.